농생대 찾은 최고령 독립유공자 육동백 선생

2006-09-11l 조회수 5886

“조국은 언제나 나와 함께였다”


독립유공자 중 최고령자인 육동백 선생이 지난 8일(목) 농업교육 100주년 기념행사를 맞아 농생대 최고령 동문으로서 강연회를 가졌다.

육동백 선생은 99세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팡이 하나로 높은 강단에 올라섰다. 넓은 강당의 이목을 한 번에 집중시킨 육 선생은 서울대 농대의 전신인 수원고등농림학교(수원고농) 시절, 1920년대로 돌아가 당시의 일을 회상했다.

육동백 선생은 “당시 고등교육은 조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 일본인 현직 관리 양성을 위한 것”이라며 “같은 일을 하고도 일본인은 88원, 한국인은 55원 밖에 못 받는 등 차별이 심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런 현실 속에서 ‘일본의 종으로 살지 말자’고 친구들과 다짐했다”며 독립운동에 투신한 계기를 설명했다. 육 선생은 농촌에서 우수한 학생들을 모집해 교육을 하고, 다시 농촌으로 파견하는 방식을 통해 농촌사회를 계몽·개발하는 ‘개척사’를 조직했지만 반일운동 혐의로 1928년 체포돼 18개월의 투옥생활을 겪어야 했다.

육동백 선생은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이 라디오 전파를 타고 흘러와 한반도를 ‘만세’의 소리로 가득하게 했던 1945년 8월 15일을 삶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주저없이 꼽았다. 그는 광복 이후 주미대사관 농무관으로 파견돼 미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4년 뒤, 육 선생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자유당 시절 인사’라는 이유로 농무관 자리에서 파면 당한다. 독립운동을 통해 구국운동을 했지만 자신은 오히려 조국에게 버림받은 것이다.

하지만 육동백 선생은 좌절하지 않았고 조국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자신은 어느 민족보다 뛰어난 한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미국에게 그 사실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쉴 새 없이 일했다고 한다. 육동백 선생은 “나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니었으며, 7천5백만 동포와 늘 함께였다”고 말하며 조국과 민족에 대한 애정을 나타냈다.

육동백 선생은 88세까지 주중에는 은행에서, 주말에는 묘포장에서 쉴 새 없이 일을 했다고 전한다. 육동백 선생은 “장수하려면 자꾸 웃어야 하고 골내면 안 된다”며 자신이 이토록 정정할 수 있는 비결을 소개했다. 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는 최선을 다하고,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육동백 선생은 ‘민족, 조국과 함께 정직하게 살자’라는 자신의 좌우명을 소개했다. 덧붙여 그는 “서울대 사람들 모두 정직하게 자신의 일에 책임을 다하라”며 “특히 학생들은 때를 놓치지 말고 공부하라”고 거듭 당부했다.

“굴곡이 많은 삶이었다”며 “앞으로 나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드는 것이 늙은이의 계획”이라고 소박한 웃음을 짓는 육동백 선생. 오랜 인터뷰 시간 동안 그가 보여준 정정함은 그의 기개를 알게 하기에 충분했다.


박성미 기자 pompom07@snu.ac.kr



▲ 사진: 황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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